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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늉만 하는 연기는 너무 진부해!

본스타수원님 | 2015.10.01 23:29 | 조회 857


배우가 등장인물을 내면화시켜 자연스럽게 발현되도록 하는 완전몰입 연기가 대세이지만 위험도 따라

 

 

 

영화 속에서 윌리엄 터너(19세기 영국의 풍경화가) 역을 맡은 티머시 스팰이 붓으로 캔버스를 쿡쿡 찌르고 그림 위에 침을 뱉는다. 캔버스를 느슨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두 예술가의 육체적 투자(physical investment)를 목격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저 한 미술가의 초상에 불과하지 않다. “작품에 자신의 본질을 투자하는(investing the work with his very essence)” 충동적이고 강박적인 화가의 초상이다. 그리고 전체론적인 표현으로서의 그림 그리기다. 잘못된 시작과 좌절, 마지막 순간의 덧칠로 완성되는 지력과 본능의 융합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한 한 배우의 매우 특별한 몰입이기도 하다.

 

 


 

마이크 리 감독의 새 영화 ‘미스터 터너(Mr Turner)’는 개봉도 하기 전 칸 영화제에서 스팰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줬다. 스팰은 또 이 역할로 생애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터너처럼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쏟은 2년 반 동안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숙제(역할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준비)를 하지 않고 촬영장에 나타날 수는 없다”고 스팰은 말했다. “과거에 비해 연기하는 일이 더 복잡해진 건 분명하다. 배우의 연기에 대한 관객의 기대가 ‘사실성(verisimilitude)’을 요구하는 쪽으로 점점 기울고 있다.”

 

요즘은 사실적인 연기를 위해 역할에 몰입하는 데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배우가 꽤 있다. 대니얼 데이-루이스가 가장 확실한 예다. 우리는 관객들이 배우의 연기를 세밀하게 관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신빙성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내기 위해 배우의 엄청난 노력이 요구되는 시대다.

 

배우들에게 캐릭터를 연기하기보다는 아예 그 캐릭터가 되기를 요구하는 마이크 리 감독의 독특한 제작 방식은 제쳐놓더라도 연기를 단순한 기술(pure technique)이 아니라 완전한 몰입(total immersion)으로 보는 경향이 갈수록 가속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완전한 몰입의 원동력을 제공하는 쪽은 누구일까? 배우일까, 감독일까, 혹은 관객일까? 감독들도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촬영장에서 ‘모티브’를 논하며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또 머리부터 발끝까지 배역에 “딱 맞는(right)” 배우를 찾아내기 위해 늘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로버트 드 니로는 ‘분노의 주먹’에서 나이 들고 살찐 복서의 모습을 연기하려고 체중을 늘려 호흡곤란 증상을 일으킬 정도였다.

 

 

 

로버트 드 니로는 ‘분노의 주먹’에서 나이 들고 살찐 복서의 모습을 연기하려고 체중을 늘려 호흡곤란 증상을 일으킬 정도였다.
 

완전한 몰입을 추구하는 경향은 연기의 세계에도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현대 관객들은 현실의 완벽한 재현을 요구하는 듯하다. 미술로 치자면 사진처럼 보이는 그림이랄까? 전통적인 연기의 테크닉과 메서드 연기(method acting, 배우가 자신이 연기할 배역의 생활과 감정을 실생활에서 직접 경험하고 거기서 자연스럽게 연기가 우러나오게 하는 기법)에서 요구되는 몰입 사이의 차이는 갈수록 커져 간다.

 

 



더스틴 호프만은 ‘마라톤 맨’에서 마라톤으로 지친 몸 상태를 실감나게 묘사하려고 3일 동안 잠을 자지 않았다.

 

 

 

메서드 연기의 대표적 배우 더스틴 호프만은 ‘마라톤 맨’(1976)을 촬영할 때 마라톤으로 기진맥진한 몸 상태를 실감나게 연기하려고 3일 동안 잠을 자지 않았다. 당시 이 영화에 함께 출연했던 로렌스 올리비에(전통적인 연기를 대표하는 영국 배우로 연극에 공헌한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는 호프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보게, 그러지 말고 그냥 연기를 하게. 그 편이 훨씬 쉽다네.”

배우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캐릭터를 전적으로 창조하던 시대가 있었다. 레퍼토리 극장(repertory theater, 특정 극단이 정해진 몇 편의 연극을 번갈아 가며 공연하는 극장) 시대의 유산이다. 그 시대에는 한 명의 배우가 다양한 역할을 동시에 맡았다. 그들은 일주일 안에 애거서 크리스티(20세기 영국 극작가 겸 소설가)부터 윌리엄 콩그리브(18세기 영국 극작가)까지, 노인부터 아이까지 다양한 작품과 역할을 소화해내는 자신들의 능력에 자부심을 느꼈다.

 

“예전에 배우 지망생들은 연극학교를 졸업하면 곧바로 레퍼토리 극단에 들어갔다”고 스팰이 말했다. “배우들은 역할이 주어지면 매우 빠른 시간 안에 그 캐릭터를 만들어내야 했으며 자신에게 맞지 않는 역할을 맡을 때도 많았다. 사실성의 구현을 위한 신속한 방법인 동시에 엉터리 배우가 되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

 

1900년대에 스타니슬라브스키가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체호프와 함께 작업하면서 ‘배우 수업(An ActorPrepares)’을 쓸 당시만 해도 자신의 책이 배우라는 직업에 이렇게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지는 몰랐을 듯하다.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메서드’ 연기법은 배우가 캐릭터의 정서적·신체적 요소들을 자신의 내면에 일치시켜 그것을 연기에 “이용”하도록 요구한다. 리스트라스버그, 스텔라 애들러, 스탠포드 마이스너 같은 미국 배우들이 이 기법을 받아들여 오늘날의 ‘메서드파(The Method School)’를 탄생시켰다. 몽고메리 클리프트, 말론 브랜도,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더스틴 호프만이 이 연기법을 신봉한다. 이들은 스타니슬라브스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각자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을 창조했다.

 

 



 

대니얼 데이-루이스는 ‘라스트 모히칸’에서 호크아이 역을 연기할 때 자신이 직접 잡아 죽인 동물의 고기만 먹었다
 

이 배우들은 외면적인 연습을 통해 캐릭터를 정착시키는 대신 캐릭터를 내면화시켜 자연스럽게 발현되도록 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배우에게 신체적·심리적 결과를 남긴다. 이 기법이 과도하게 적용되면 자아상 왜곡(distortion of the persona)을 일으킬 수 있으며 극단적인 경우 정신분열증이나 현실과의 완전한 유리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대니얼 데이-루이스는 역할을 맡을 때마다 장기간 집중적으로 준비하는 자신의 습성이 자신을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기 힘든 사람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라스트 모히칸’(1992)에서 호크아이 역을 맡았을 때는 자신이 직접 잡아 죽인 동물의 고기만 먹었다. 먼저 사냥과 덫으로 야생동물을 잡은 다음 껍질을 벗기는 법을 배웠다.

 

‘나의 왼발’(1989)에서 뇌성마비 작가 크리스티 브라운 역을 맡았을 때는 그 역할에 몰입하기 위해 촬영하는 사이사이 어디를 가도 다른 사람에게 업혀 다니고 옆에서 숟가락으로 떠먹여주는 음식을 받아먹었다. 연기를 위해 스스로를 자신의 원래 인격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분리시키려면 가족을 포함해 정상적인 생활로부터도 일시적으로 격리돼야 한다.

 

 



매튜 매코너히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 에이즈 환자 역을 맡았을 때 얼음을 씹어 먹으며 23kg을 감량했다

 

크리스천 베일이 다양한 역할을 위해 실시했던 극단적인 다이어트와 운동요법은 그의 몸을 인간으로서 견딜 수 있는 한계까지 몰고 갔다. ‘머시니스트’(2004)에서 1년째 잠을 자지 못해 해골처럼 비쩍 마른 기계공 역을 맡았을 때는 4개월 동안 커피와 물, 사과(하루에 한 개)만 먹는 지독한 다이어트로 28㎏을 감량했다. 로버트 드 니로는 ‘분노의 주먹’(1980)에서 무명 복서 제이크 라모타 역을 맡아 영화 후반부에서 나이 들고 살찐 모습을 연기하기 위해 체중을 늘렸다. 과체중으로 호흡 곤란 증상을 일으켜 촬영이 중단될 정도였다.

 

 

 

많은 배우들이 증명했듯이 이런 몰입적인 연기에는 보상이 따른다. 데이-루이스는 아카데미상을 세 번이나 받았다. 그밖에 부수적인 이점도 있다. 스팰은 영화를 촬영하면서 피아노 연주하는 법을 배웠고 미니캡(영국의 콜택시)을 운전기사처럼 운전할 수 있게 됐다. 또 ‘라스트 행맨’(2005)에서 영국의 마지막 교수형 집행인 앨버트 피어포인트 역을 맡았을 때는 집중적인 사전 준비를 통해 자신감 있게 교수형을 집행할 수 있게 됐다고 스팰은 말했다. “그 역할을 연기한 뒤로는 누군가를 목매달아 해치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럴 마음은 없었지만 하려면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런던 극예술학교(LAMDA)의 교감 존 배시포드는 “사실성에 대한 기대는 TV와 영화 때문에 생겨났다”고 말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카메라 렌즈 때문이다. 연극에서도 훈련을 통해 사실성을 상당 수준 추구하지만 전적으로 몰입하는 기법을 적용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하지만 사실성의 요구가 극단적인 몰입으로 인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매튜 매코너히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2013)에서 에이즈 환자 역을 연기할 때 “얼음을 씹어 먹으며” 23kg을 감량했다. 로버트 드 니로는 ‘케이프 피어’(1991)에서 사이코패스 맥스 케이디 역을 맡았을 때 치과에서 5000달러를 들여 치아를 갈아 보기 흉하게 변형시켰다.

배시포드는 이렇게 극단적인 신체 변형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 할리우드는 신체의 이미지에 지나치게 매달린다. 배우들은 각자 나름대로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방식이 있다. 나 같은 경우엔 만약 그런 극단적인 방식을 취해야 한다면 미쳐버릴 것 같다.”


 

공연예술 종사자들의 질환을 전문으로 하는 정신과의사 데스먼드 비덜프 박사는 그 분야에 인격장애와 불안증의 위험이 상존한다고 말한다. “많은 배우들이 어떤 역할을 연기할 때만 현실감을 느낀다”고 그는 말했다. “그들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 자심감을 갖지 못한다. 연기를 할 때만 불안증이 사라진다.”

 

더 심한 경우도 있다. 비덜프는 전환 히스테리(conversion hysteria)라는 증상을 예로 들었다. 이 증상을 보이는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의 후유증으로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신체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비덜프에 따르면 TV 드라마 ‘이스트엔더스(East Enders)’에서 유방암에 걸린 캐릭터를 연기한 한 여배우는 그 후유증으로 자신이 실제로 “많이 아픈”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비덜프는 연기가 사람들을 다양한 상황에 적응할 수 있게 만드는 인간의 정상적인 기능 중 하나라고 믿지만 배우들에게 위험이 따른다고 말한다. “배우가 역할에 맞는 캐릭터를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원래 성격을 완전히 희생시킬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그 정도에 이르면 이미 연기가 아니다.”

 

게다가 사실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증가하수록 관객들이 잃게 되는 측면이 있다고 그는 믿는다. “관객이 더는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배우와 관객 간 참여의 측면을 잃게 된다. 영화나 연극이 너무 사실적일 때 그런 일이 일어난다.”

논란을 불러일으키기 쉬운 영화와 TV의 특성이 자연스러운 묘사에 대한 좀 더 엄격한 접근을 요구한다. 캐릭터를 설정할 때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말이다. 티머시 스팰은 리얼리티 TV와 다큐드라마, 그리고 드라마의 인기가 관객과 연기자의 거리를 좁혔다고 믿는다. “요즘은 테크닉을 이용한 연기를 알아보기가 더 쉬워졌다. 그런 연기는 경직돼 보인다.”

 

 

하지만 스팰은 자연스러운 연기를 통한 사실성의 추구에도 위험이 따른다고 말한다. “많은 배우들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연기라고 믿는다.” 캐릭터의 사실적 묘사에 집착하는 최근의 경향에는 배우의 심리적 파편화라는 위험이 따른다. 최상의 경우 배우들은 자신이 맡았던 유명한 캐릭터의 살아 있는 캐리커처가 될 수 있다. 영국의 원로배우 에드워드 폭스와 로버트 하디가 이런 경우다. 최악의 경우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과 히스 레저처럼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결과의 차이는 어떤 역할을 맡느냐와 거기에 어느 정도 몰입하느냐에 달렸다. 스팰은 이전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리게 됐으며 대니얼 데이-루이스는 햄릿을 연기할 때 자기 아버지의 유령을 “보고” 신경쇠약증에 걸린 것으로 유명하다. 스팰의 말대로 “배우들에겐 저마다 맞는 역할이 따로 있다.”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은 “인간은 너무 많은 진실을 견뎌낼 수 없다(Humankind cannot bear very much reality)”고 썼다. 어쩌면 로렌스 올리비에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 이제는 ‘연기’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듯하다. 그 편이 꼭 더 쉽지는 않지만 덜 위험한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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